양승은님 한테 받음
맑스주의 구조 분석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사회과학과 인문학이 지나치게 파편화되어 있다는 비판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 계급과 자본주의의 전체적 구조보다 젠더, 인종, 생태, 장애, 돌봄, 정동, 친밀성 등 개별적인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사회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시야가 사라졌다는 것 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맑스주의적 구조 분석의 복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러한 문제제기를 단순히 낡은 것으로 치부할 필요는 없다. 개별적인 현상들이 서로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관계들이 생산과 재생산, 국가와 제도, 노동시장과 소유관계 등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개별적인 현상만을 고립시켜 바라볼 때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을 놓칠 수 있다는 맑스주의의 오래된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문제는 구조를 분석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구조 분석은 서로 다른 현상들을 하나의 원리 아래 통합하는 작업과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구조 분석이 해야 할 첫 번째 작업은 무엇이 실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무엇을 통해 연결되어 있고, 반대로 무엇은 연결되어 있지 않은지를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1. 총체성은 통합의 명령인가
이 문제를 생각할 때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은 여전히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맑스주의를 다른 사회과학과 구별하는 핵심을 개별 명제의 참과 거짓보다 총체성의 관점에서 찾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적 관계가 분절된 사실과 독립된 사물의 형태로 나타난다. 따라서 개별적인 사실을 그것만으로 파악해서는 그 사실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관계와 역사적 운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개별적인 것을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맑스주의적 인식의 중요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루카치의 총체성의 관점을 모든 현상을 하나의 원리로 환원하라는 요구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총체성이 의미를 가지려면 개별적인 것과 전체 사이에 매개가 있어야 한다. 어떤 개별적 현상이 전체의 일부라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 현상이 어떤 제도와 관계를 거치고, 다른 현상들과 어떤 인과적·기능적·역사적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의 사회적 전체를 구성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총체성은 개별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과 전체 사이의 구체적인 매개를 추적함으로써 파악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루카치와 일정한 거리를 둘 필요도 있다.
『역사와 계급의식』의 루카치는 자본주의 사회가 하나의 역사적 총체성을 이루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통해 이 총체성을 인식할 수 있는 특권적인 가능성을 갖는다는 강한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총체성과 그것을 인식할 주체 사이에 강한 연관이 설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전체가 존재한다는 것과 우리가 그 전체의 구성원리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더구나 어떤 관계가 과거에는 전체를 구성하는 핵심적 매개였다고 해서 오늘날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총체성은 연구에 앞서 보증된 결론이라기보다 연구를 통해 계속 검증되어야 하는 가설적 지평에 가까워야 한다.
2.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연결해야 한다는 것
어떤 현상이 자본주의와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현상을 곧바로 자본주의의 기능이나 효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사이에는 법과 제도, 조직, 가족, 기술, 문화적 규범, 국가정책, 노동시장, 역사적 우연 등 수많은 매개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매개들은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선언이 아니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입증하는 것이다. 이 차이는 사소하지 않다.
전체성을 연구의 출발점에서 이미 가정하면 개별 연구의 역할은 그 전체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축소될 수 있다. 연구대상이 기존 이론과 맞지 않을 때조차 새로운 현상을 통해 이론을 수정하기보다, 그 현상을 기존 구조 안에 위치시키기 위한 매개를 사후적으로 만들어내기 쉽다.
이때 구조는 설명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가정된 전제가 된다.
그러나 구조 역시 역사적으로 만들어지고 변화한다.
어떤 시기에 강력했던 매개가 다른 시기에는 약화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 과거에는 별개의 영역이었던 것들이 새로운 제도나 기술을 통해 긴밀하게 연결될 수도 있다. 반대로 하나의 구조 안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현상들이 서로 다른 논리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할 수도 있다.
따라서 매개는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매개가 사라졌다면 그것이 사라졌다는 사실 자체를 설명해야 한다. 반대로 새로운 매개가 형성되었다면 그것이 언제 어떤 조건에서 형성되었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과거의 이론적 전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라진 매개를 개념적으로 복원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매개를 가정하는 순간, 구조 분석은 현실을 설명하는 이론에서 이론 자체를 보존하는 장치로 바뀐다.
그렇다면 맑스주의적 구조 분석은 전체성을 보존하는 작업이라기보다 전체성이 실제로 어떤 관계를 통해 성립하고 있는지를 계속 검증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이렇게 이해하면 총체성의 관점 역시 모든 것을 연결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연결 자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요구로 다시 정의할 수 있다.
3. 미시적 연구는 개인주의적인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연구의 파편화라는 문제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다.
젠더, 생태, 장애, 돌봄, 정동, 친밀성 등에 대한 연구가 증가했다는 사실만으로 연구가 개인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연구대상의 크기와 분석의 구조성은 같은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관계를 연구하면서도 그것을 만들어내는 제도와 권력관계를 분석할 수 있다. 반대로 세계경제 전체를 이야기하면서도 몇 개의 추상적 범주를 반복하는 데 그칠 수도 있다.
거시적인 대상을 연구한다고 구조적인 것이 아니며, 미시적인 대상을 연구한다고 개인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연구들은 기존의 구조 분석이 하나의 범주로 처리했던 영역 내부에 얼마나 이질적인 관계들이 존재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
예컨대 노동이라는 하나의 범주 안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주노동과 돌봄노동, 임금노동과 무급노동이 동일한 방식으로 조직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계급 분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계급 분석이 당연하게 여겼던 매개를 다시 검토하는 작업일 수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개별 연구들을 다시 하나의 중심적인 이론으로 통합하는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연구가 발견한 관계들이 어디에서 접속하고, 어떤 매개를 통해 접속하며, 어디에서는 접속하지 않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맑스주의는 모든 연구를 하나의 언어로 번역하는 메타언어가 아니라 여러 사회적 관계의 연결을 탐구하기 위한 강력한 분석도구가 될 수 있다.
생산관계, 착취, 가치, 축적, 계급, 사회적 재생산 같은 개념은 여전히 많은 현상을 이해하는 데 강력하다. 그러나 그 개념들의 힘은 모든 것을 그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고 어디에서 다른 분석이 필요한지를 구별할 수 있을 때 그 설명력은 더 강해진다.
4. 실천을 위한 연구라는 문제
이 문제는 연구와 실천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연구가 현실의 문제에서 출발하고 실천적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맑스주의의 역사 자체가 현실의 정치적·사회적 문제와 분리된 순수한 학문적 탐구의 역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실천적 관심이 연구의 출발점이라는 것과 연구가 특정한 실천적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연구의 결과는 기존 운동의 전략을 지지할 수도 있지만 수정하거나 부정할 수도 있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문제가 실제로는 예상했던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문제들이 실제로는 상당히 독립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것 역시 실패한 연구가 아니다. 오히려 실천적 연구에 가장 필요한 것은 실천에 유용한 결론을 생산하는 능력이라기보다 실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가정을 검증할 수 있는 능력일 수 있다.
연구가 언제나 운동의 자기 이해를 확인해준다면 연구는 실천과 결합한 것이 아니라 실천에 종속된 것이다.
실천과 연구 사이에는 일정한 긴장이 필요하다. 연구가 실천에서 질문을 얻을 수 있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까지 실천으로부터 미리 받아서는 안 된다.
5. 주체와 헌신을 구조적으로 분석한다는 것
이 원칙은 운동 자신의 재생산 문제를 다룰 때 더욱 중요하다.
운동이 지속되지 않을 때 우리는 흔히 주체의 부재, 헌신의 부족, 조직적 재생산의 실패를 이야기한다. 물론 운동에는 사람이 필요하며 사람들의 지속적인 참여 없이는 어떠한 조직도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구조 분석을 강조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왜 사람들이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헌신할 수 없게 되었는가?
노동시간과 고용형태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주거와 돌봄의 조건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교육제도와 대학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사람들이 하나의 조직에 장기간 소속될 수 있는 생애경로는 여전히 존재하는가. 활동가가 자신의 삶을 유지하면서 장기간 활동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은 존재하는가. 과거의 조직형태를 가능하게 했던 사회적 조건 가운데 무엇이 사라졌는가.
이 질문을 건너뛴 채 ‘헌신하는 주체를 다시 형성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상한 역전이 발생한다.
조직이 사람을 재생산하지 못하는 문제가, 조직을 재생산할 수 있는 사람이 부족한 문제로 바뀌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루카치의 주체 문제가 다른 방식으로 돌아온다.
주체를 구조의 외부에서 등장하여 구조를 변화시키는 순수한 의지의 담지자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 주체 역시 특정한 사회적 관계와 물질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다. 사람들이 장기간 공부하고, 조직하고, 활동하고, 관계를 맺고, 실패한 뒤에도 다시 활동할 수 있는 조건 자체가 사회적으로 생산된다.
따라서 주체의 형성을 이야기한다면 주체에게 요구되는 헌신의 정도만이 아니라 그러한 헌신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어떻게 생산되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구조 분석은 사회를 설명할 때만 사용되고, 정작 자신의 운동을 설명할 때는 의지와 품성의 언어로 후퇴하게 된다.
6. 과거의 헌신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과거의 운동이나 연구공동체가 활발했던 이유를 설명할 때도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헌신적이었다는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설령 실제로 더 많은 시간을 조직과 연구에 투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설명되어야 할 현상이지 설명 그 자체가 아니다.
왜 그러한 헌신이 가능했는가?
당시의 대학과 노동시장, 주거비용과 생애주기, 조직문화와 정치적 전망, 출판시장과 지식생산 구조, 운동조직의 규모와 공동체적 관계는 어떠했는지, 활동에 시간을 투입했을 때 기대할 수 있었던 정치적·사회적 효능감은 지금과 어떻게 달랐는지, 그리고 그러한 조건 가운데 어떤 것이 오늘날 사라졌거나 변형되었는지. 이것을 분석해야 과거의 경험을 현재에 적용할 수 있다.
과거의 헌신적인 인물을 모범으로 제시하고 현재의 사람들에게 같은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역사적 경험을 계승하는 가장 쉬운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가장 비역사적인 방법일 수도 있다.
사람은 조건과 무관하게 반복해서 생산되지 않는다. 과거의 주체를 가능하게 했던 조건이 사라졌다면 필요한 것은 그 주체를 다시 호출하는 일이 아니라 왜 그 조건이 사라졌으며 오늘날에는 어떤 다른 형태의 주체와 조직이 가능한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7. 구조 분석은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결국 문제는 맑스주의적 구조 분석을 어디까지 적용할 것인가에 있다.
자본주의 경제를 분석할 때는 구조를 이야기하면서 연구공동체와 운동조직의 쇠퇴를 설명할 때는 개인의 헌신을 이야기한다면 구조 분석은 일관된 방법론이라고 하기 어렵다.
오히려 구조 분석이 가장 필요한 순간은 우리가 쉽게 개인의 의지와 품성으로 설명하고 싶어지는 순간일 수 있다.
왜 사람들은 조직되지 않는가.
왜 과거와 같은 공동체가 만들어지지 않는가.
왜 연구자들은 장기간 집단적인 연구에 참여하지 않는가.
왜 운동조직은 세대를 넘어 재생산되지 않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요즘 사람들의 개인주의’나 ‘헌신의 부족’이라면 맑스주의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분석적 장점을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다.
맑스주의적 구조 분석의 강점은 모든 것을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개인의 의지나 품성으로 보이는 현상 뒤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드는 관계와 조건을 찾아내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원칙은 다른 사람과 다른 시대를 분석할 때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운동과 이론적 전통을 분석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8. 전체성을 보존하는 대신 전체성을 연구하기
따라서 오늘날 맑스주의적 구조 분석의 과제는 흩어진 연구들을 다시 하나의 전체성 아래 복속시키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필요한 것은 전체성을 미리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어떤 관계들이 실제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때로는 연결을 발견해야 한다. 때로는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더 이상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때로는 과거에 중요했던 매개가 사라졌음을 밝혀야 하고, 반대로 기존 이론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작은 관계가 사회 전체를 움직이는 새로운 매개가 되었음을 발견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루카치의 총체성이라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중요하다. 개별적인 사실을 고립된 채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관계의 전체를 묻는 태도를 포기할 이유는 없다.
다만 오늘날 총체성은 이미 알려진 전체의 이름이어서는 안 된다. 총체성은 설명의 전제가 아니라 설명되어야 할 문제다.
구조 분석은 세계를 하나의 이론 안에 집어넣는 작업이 아니다. 무엇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고, 무엇이 무엇을 제약하며, 서로 다른 관계가 어떤 매개를 통해 연결되고, 그 매개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지고 변화하고 사라지는지를 밝히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맑스주의적 구조 분석에 필요한 것은 더 강한 통합의 의지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연결을 당연시하지 않는 더 엄격한 태도, 그리고 자신이 믿어온 전체성마저 다시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강길모님 페북에서 퍼온 글입니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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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오샘 댓글 입니다ㆍ
글쓴이의 문제의식은 맑스주의자나 연구자의 총체적 이론과 실천의 과제이고 고민입니다 이 분은 루카치를 통해
구조.매개.개별 사이의 현실적으로 얽혀 있는 복잡한 관계까지 보지 못하는 거시적 구조적 분석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맑스주의자를 포함한 사회과학자와 인문학자가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나처럼 오랫동안 심리학.사회학.인류학.역사학 그리고 예슬을 포항한 분야까지 학습하면서
맑스주의 이론과 혁명적 실천에 몸다아 왔던 사라의 고민이었거든요
이 글의 아쉬운 점은
이 분이 지적한 이른바 맑스주의가 놓치고 있는 총체적 구조적 관계망들을 현실 자본주의의 실재를 놓고 분석하면서
다른 맑스주의자들이나 맑스주의 조직들이 무엇을 간과하고 놓치고 있는지를 겅증하고 비판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분이 앞으로 그런 분석을 통해 위와 같은 글의 타당성을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
승은 동무가 지금까지 소개했던 시와 맑스주의 관련 글들을 보내주시고 방에도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시면 나는 댓글을 달겠습니다 투쟁!!!